대충 살펴보는 정사 삼국지. 2 - 황건적의 난.대충 살펴보는 정사 삼국지. 2 - 황건적의 난.

Posted at 2012.12.07 12:43 | Posted in 기획특집


한(漢) 이라는 나라가 건국된지 어연 300년. 망할 위기는 여러번 있었고, 실제로 한번은 사실상 망했던 한나라이지만, 그럭저럭 백성들에게 지지받았고, 그럭저럭 프로파간다 전파에 성공한, 나라였기에 위기시마다 불사조처럼 살아나고는 했다. 하지만 그런 한나라의 영광도 거의 끝나가던 때. 외척들의 횡포를 잡으라고 등용해둔 환관이 외척을 때려잡은 뒤 온갖 쌩 횡포를 부리던 때였다. 나라꼴이 막장이다. 이는 곧 종교가 발돋움하기 딱 좋을 때라는 뜻이다. 예수그리스도가 기독교를 창시할 당시의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 상태였으며, 무함마드가 이슬람의 깃발을 그리기 시작한 무렵의 중동 땅 역시 소수의 거상이 절대다수의 노예를 가축부리듯 부리는 그런 시대였다. 즉 종교는 난세의 필수요소고, 난세는 종교의 필수요소다. 혼탁한 시기 민중은 종교에 의지한다. 하지만 괜히 혼탁한 시기겠는가? 난세의 종교는 썩을때로 썩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가령 성경에서 예를들자면, “일요일에 사람을 살렸으니 너 이단!”을 당당하게 외친 바리세인들이 썩어빠진 종교인의 예시가 되겠다.[각주:1]



http://sstatic.naver.net/people/78/200902022135124461.jpg인물사진




요즘 이라면 기독교 계통의 종교에서 사이비가 나오기 쉽겠지만, 때는 서기 184년. 당연하게도 중국에 기독교가 들어오지 못했다. 불교야 들어오기는 했지만,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중국땅에서 가장 메이저한 종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건 아니었다.당시 중국땅에서 가장 잘나가는 종교는 도교다. 그렇다. 신선놀음이다. 후한말. 중국 역사에서도 손꼽힐만한 난세이니 만큼, 그 시대의 도교는 상당히 메이저한 두 개의 종파를 만들어넸는데, 그중 하나는 오늘날까지도 믿는사람이 상당수 있는 장로의 오두미도다. 삼국지에서는 그저그런 2류영주로 나오는 장로지만, 현재까지도 믿는자가 있는 도교의 매이저종파인 오두미도의 3대 교주로써 도교 역사에서는 그럭저럭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오두미도 이전, 오두미도보다 먼저 도교가지고 뭔가 정치를 해보려는 도교의 종파가 있었으니 그 종파가 바로 태평도이다. 모든사람은 하늘의 이치를 따라야 해요! 나쁜짓 하면 벌 받아요! 지금 세상은 썩었어요! 그런데 킹왕짱 대단한 매시아가 올거에요! 같은 종교의 필수요소는 갖출대로 갖춘 요 태평도는 혼탁한 사회상에 힘입어 크게크게 뻗어나갔다. 한편 그렇게 크게크게 뻗어나가는 자신의 창작물을 보면서 흡족해하던 장각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한나라는 좆나 막장인데 우리애들은 무진장 많잖아. 내가 일어서면 내가 황제되는거 아니야?"


그리하여 장각은 날로 늘어나는 신도의 쪽수를 쳐믿고, 군사를 일으키기에 이른다. 그때 장각이 꺼낸 레퍼토리는 다음과 같다. “퍼런 하늘은 이미 죽었다. 누런 하늘이 일어선다.” 음양오행설에 따라 한나라는 파란색이고, 파란색 다음의 시대는 누런 시대인데, 퍼런 시대 다음에 누런시대가 오는건, 계절이 바뀌는 것과 같은 상생이므로 노란색을 상징색으로 썻다. 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지만, 그 외에 중국애들이 누런색을 워낙 광적으로 좋아하는 것도 한 몫한다. 오행설상, 누런색은 중앙에 위치한 색. 즉 킹왕짱한 색이며, 중국신화에서 가장 쌘 신의 이름은 황제(黃帝) 즉 누런색의 신 되시겠다. 하지만 퍼런색 다음엔 누런색 이라는 프로파간다 자체는 후세에도 먹혀 들었는지 위나라의 첫 연호는 황초(黃初)이며, 오나라의 첫 연호는 황룡(黃龍)이다. 한나라를 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나라의 직통이라는 뿌뿌뿡!” 하던 촉나라만 장무(章武)라는 누런색과 상관 없는 연호를 사용했다.
그렇게 중국인의 마음속에서 영혼의 색의 역활을 하던 "누런색"  이 킹왕짱임 이라는 이데올로기와 함께 황건적은 일어났다. 그들의 상징인 노오란 두건과 함께 말이다. 물론 황건적 이라는 말은 기득권층인 한나라 에서 부른 명칭이고, 황건적 측에서는, 태평군 혹은 황건군 이라는 보다 스무스한 명칭을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황건적(賊) [도둑 적] 이라는 이름의 의미만 무시한다면, 황건적 이라는 이름도 꽤나 간지다. 물론 의미가 '누런두건낀 도적놈' 이라는 엿같은 의미여서야 본인들 스스로고 황건적 이라고 말하고 다닐수는 없다.




모 애니의 모 일진은 스스로 황건적이라고 자칭하고 다니지만, 그건 일진 이야기고.




코에이 삼국지 등에서는 안습한 능력치의 야라레 정도로 묘사되는 황건적 이지만, 사실상 한나라를 멸망시킨게 황건적이니 만큼 아주 안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황건적은 초반에는 관군을 이겼다. 한나라가 워낙에 막장이니 만큼 황건적은 금방에라도 한나라를 겁탈해 버리고, 온 천하를 누런깃발로 채울 듯 해보였지만, 황건기의가 황건적의 난으로 바뀌면서부터 이는 달나라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민중봉기 뭐 좋다. 세상을 단번에 바꿀수 있는 괜찮은 선택이다. 하지만 애초에 황건군이 체계와 물자를 갖춘 한나라군을 초반에 이길수 있었던 이유는 황건군에게 민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못참겠다 바꿔보자!” 라는 어디선가 들은 것 같기도 한 구호와 함께 지배지의 백성들의 호흥을 얻으며, 세력을 부풀려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황건군의 규모가 커지면서 황건군의 통치는 매~우 어려워지게 된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가 약 400km다.(도로거리 기준) 사람이 걷는 속도의 평균은 약 시속 4km. 즉 쉬지않고 걸어야 4일 정도 걸린다. 하지만 사람인 이상 쉬지않고 걷는건 말도 안되는 일이다. 자는시간, 밥먹는 시간 등등을 합하면 쉬는시간은 여행시간의 거의 절반. 즉 8일 정도는 걸어야 도착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시대는 바야흐르 한나라 말기. 산업혁명 따위는 먼 훗날의 일일 뿐이오, 중국인들이 로마인들처럼 도로덕후인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오랜기간 동안 지속된 폭정 덕에 그 도로의 관리도 제대로 안됬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금 소요시간은 뻥튀기 된다. 적어도 15일 정도는 걸어야 도착 가능하다. 더욱이 당시 사람들의 체격조건은 현대인에 비해서 매우 열약했다. 평균 4km의 속도를 내기 위해서는 현대인보다 자주 쉬어져야 한다. 여기서 이틀 정도를 더 쉰다고 치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리는 거리는 약 17일이다.

물론 이건 주먹구구식으로 계산한 거리다. 하지만 당시의 주와 주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멀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뭐 말을 태워 보낼 경우 훠월씬 단축되기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전설로 불리는 적토마와 같은 말들. 즉 뻥이 가미된 반쯤은 환상종인 말들이 하루에 천리. 즉 400km 간다. 이는 오늘날의 도로를 달릴 경우 서울에서 부산까지 하루만에 갈 수 있는 우월한 속도이지만, 사람 달릴만한 도로가 없는 시대에 말 달리는 도로라고 제대로 구비됬을 것 같지는 않다. 또한 하루에 천리 달리는 말이라고 해도 이틀에 이천리 달리는건 무리다. 이는 하루에 자위를 5번 할수 있는 남자가 이틀동안 자위를 10번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말 역시 사람인지라 쉬어야 한다.

즉 이것저것 긍정적으로 계산해도 서울에서 부산 정도의 거리를 말타고 거니는데는 3일 이상이 소요된다.
그리고 보면 알겠지만, 당시 중국의 주의 크기는 중원땅에 자리잡은 인구밀도 높고, 그나마 작은 주 조차도 남한땅과 크기가 삐까비까 하다.




황건적은 청주, 서주, 유주, 기주, 형주, 양주, 예주 등. 후한 13주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6개 주에 세력을 떨쳤다. 그리고 위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중원땅의 좁은 대신에 인구밀도가 높은 주들 조차도 남한 영토와 거의 삐까삐까 뜬다. 즉 황건군 끼리의 의사소통은 제대로 될리가 없다.






그럭저럭 선진국이라는 2011년의 영국에서도  처음에는 정당한 목적의 시위로 시작해서, 불을 지르고 '혼돈, 파괴 망각!' 을 외치는 대폭동으로 비화된 일이 있다.[각주:2] 2011년이 이러할진데 서기 200년은 오죽 하겠는가?  당시의 황건군은 먹고살기 힘들어 일어난 사람들이다. 즉 당장에 먹고살기 힘드니 남들것을 뺐자! 라는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매우 쉬운 상황이다. 더욱이 어중이 떠중이 도적들이 요새 잘나가는 누런두건 코스프레를 하며 도적질을 하니, 황건군이 황건적이 되는건 순식간의 일이다. 황건적이 무슨 돈이있고 빽이 있어서 반란을 일으켰는가? 그들에게 제산이 있다면 부폐한 한나라를 쳐부순다는 대의명분이오, 그들에게 빽이 있다면 바른 정치가 펼쳐지기를 바라는 민중들이다. 그 돈과, 그 빽을 스스로 저버렸으니 황건적의 몰락은 자명한 일이다.[각주:3]

그렇게 황건적의 난이 관군. 그리고 의병에 의해 진압되기 시작할 무렵, 장각이 죽었다. 지도자의 죽음. 그것은 그 지도자가 축지법을 쓰고, 공중부양을 하고, 결과적으로 세상을 바꿀꺼에요~ 라는 믿음으로 반란을 일으킨 황건적들에 있어서는 매우 크나큰 사건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황건적에 맞써서 한나라의 평화를 지키자. 라는 명분하에, 실제로는 한 몫 잡아볼 요량으로 나선 이들에 있어서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렇게 한때 한나라를 먹을랑 말랑 했던 황건적의 세력은 점점 줄어들었다.

한편 황건적을 열심히 때려잡은 관군과 의병 중에서 특별히 세명의 중요한 사람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위촉오 삼국을 새운 시조님들 되시겠다. 유비, 조조, 손견이다.[각주:4]




 

  1. 근데 성경책에서만 있는줄 알았던 바리세인이 현대의 한국에서도 출몰한다는 소문이 있다. [본문으로]
  2. 물론 이건 극단적인 경우다. 대부분의 시위는 저딴식으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다 보니 저 이상의 일이 벌어질 가능성도 크다. 가령 일본의 전국시대. 인의군자로 칭송받았던 우에스키 짜응의 18번은 점!령!지!약!탈! 이었다. [본문으로]
  3. 근데 사실 이게 또 어쩔수 없다. 중국땅이 좀 큰가? 돈도 뺵도 없이 일어선 반란군들이 전국적인 인프라를 갖춘다는건 말도 안된다. 실제로 중국역사상 일어난 크고작은 종교반란중 성공한 것은 홍건적의 난 하나뿐이다. 홍건적의 난은 지배층이 몽고놈이다. 중국인이여 일어서자! 라는 명분으로 성공할 수 있었지만, 후한시대의 지배층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인이다. [본문으로]
  4. 손견의 경우에는 사실상 나라꼴 갖추기 시작한건 손책떄이며, 독립국을 표방한건 손권때 이지만. 손견의 이름은 손책이 강동을 재압하는 중요한 디딤돌 이었다. 손권은 뭐 말할것도 없이, 그 손책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뿐이고. [본문으로]
  1. 재미있는 삼국지 잘 봤습니다. 요즘 저도 삼국지2 게임을 다시 시작하고 있는데요. 그 것과 더불어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2. 황건적의 정치이념은 조조에게 흡수된다는 일본 학자 설에 따라
    황건적은 살아남았다고 믿어요!(청주병 말고)

    내가 굳이 황장미 팬이래서 황건당을 지지하는 게 아님!
    (지크 로자 페티다!! 에리코후 아크바르~!)
    • 2012.12.09 02:07 신고 [Edit/Del]
      흠 조조의 정치적 사상이라... 문재는 황건당의 사상도, 조조의 사상도 기록이 매우 빈약하단거... 그나마 연구가 활발한 삼국지 관련이여도 이정도니 뭐...
  3. 뭐, 엄밀히 말하자면 황건적의 난은 주준, 황보숭, 노식과 같은 최후의 명장들의 손에
    진압되었다고 봐야겠지만서도.. 그들의 부장으로 활약한 조조 유비 손견이 좀 킹왕짱이긴 했습니다.

    개인적으론 한나라를 멸망케 한 건 동탁 이 시벌내미 때문으로 봅니다. ㅋㅋ
    • 2012.12.09 02:02 신고 [Edit/Del]
      가끔식 동탁을 찬양하는 자들도 있거군요. 물론 그들이 정사와 연의에서 취사선택한 소리를 들어주는건 지적고문 입죠.
  4. 황건적과 오두미교, 홍건적과 백련교도, 홍수전과 태평천국의 난, 글구 모택동과 공산당(종교는 아니지만 사상적 구심점 역할은 했죠. 유사 종교 역할도 있긴 하구)
    중국 사회 변혁은 종교와 사상에서 시작한 경우가 많죠..
    • 2012.12.09 01:57 신고 [Edit/Del]
      마오의 것은 그냥 종교로 쳐도 되지 않나 싶습니다. 맑시즘을 농민한테 적응한다라.... 참새를 싹 다 잡으면 농사가 잘될거라고 진지하세 생각하는 사람의 머리에나 나올법한 이론이에요
  5. 장각이 황제가 되건 말건, 황건의 난이 성공하건 말았건 저 규모로 민초가 들고 일어났다는 측면에서
    이미 한나라의 끝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정해졌다고 밖에는 볼 수가 없었죠...
    그걸 그 이상으로 끌고간 당대 인물들이 말도 안되는 존재라고 밖에는.
    • 2012.12.09 01:47 신고 [Edit/Del]
      민초가 칼을 들었을때 지배층은 그들을 도적이라 칭하지만, 백번 양보해서 그들을 도적이라 치더라도 그들은 작은 도적일뿐 큰 도적은 따로있죠.
  6. 좋은글 잘 보고 갑니다 ^^
    알찬 주말을 보내세요~
  7. 유비는똥별이
    당시 중국 전토의 인구와 면적은 오늘날의 아르헨티나와 거의 동일했다. 280제곱킬로미터와 5천만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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